다들 어렸을때 한번쯤은 이런 것을 해보거나 경험했을 것이다.
나만의 아지트 혹은 비밀공간과 같은 은신처, 도피처를 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여자 주인공인 이신애가 남편의 죽음으로부터 서울에서 밀양으로 내려온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남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있는 김종찬의 도움을 얻고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내뱉은 이신애의 말이 이러한 지점을 잘 보여준다.
"비밀밀 볕양 이름 이쁘죠?"
남편이 살아생전 고향인 밀양을 가고 싶어했지만, 얼마든지 다른 곳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밀양을 선택했다. 그리고 밀양이라는 이름의 뜻을 풀이하였는데, 비밀스러운 햇살이라!
아마 이신애가 밀양으로 온 이유엔 이름의 뜻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리라.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마주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비밀스럽지만 따뜻한 햇살이 존재하는 자신만의 공간을 원한다. 이신애도 남편의 죽음에서 도피할 은신처로서 밀양을 선택했을 것이리라
우리가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하는 첫번째 행동이 무엇일까? 공간을 내 방식대로 정리하고 내 방식대로 꾸민다.
이신애 역시 그런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사 온 뒤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무례하게 인테리어 지적하기, 대외적으로 부동산 구매 행위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등 자신만의 방식대로 정리하고 꾸밀려 한다.
여기서 주의깊게 생각할 것은 이신애가 밀양에서 정착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에서 어느 하나도 자식을 위한 행동들은 없었다는 점이다. 아들인 준은 처음부터 밀양에 오기 싫어했다. 허나 이신애는 외면했다.
그렇기에 준의 죽음은 이신애로 하여금 남편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죽음은 자연재해와 다를게 없었지만, 준의 죽음은 이신애 스스로가 남편의 죽음에 외면하여 밀양에 온 것, 자신의 정서적 안정감을 위해 밀양에 대해 불만을 표한 준에 대한 외면, 도피처에서 이때까지 이신애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보여준 자기 삶에 대한 외면들의 결과값이기 때문이다.
참 재밌는 지점은 준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이신애는 준의 죽음조차도 외면하고 있다. 울지 않음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면을 보여주는 장면들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바로 살인자를 보고도 눈을 못 마주치는 장면이다.
이신애는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자조차도 외면한 것이다.
이때까지 외면만을 하며 살아온 이신애가 준의 죽음으로도 변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신애가 교회를 가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반인이 자기가 감당하지 못하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당연히 위선일지라도 선을 지향하는 교회와 같은 종교 공동체를 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결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삶에 대해 외면을 하면 사람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어떻게 이 영화가 종교적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물론 왜 교회인가 라고 물으면 당연히 교회, 개신교가 한국에 가장 많아 접근성이 좋으니까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별거 없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도 기생충에서 상징에 연연하지 말라고 연출한 것처럼 너무 과한 상징 부여는 의미가 없다.
이신애가 교회에 들어가 빠르게 안정이 된 후에 보여준 행동들을 유심히 봐야한다. 그녀가 교회에서 한 행동들은 그녀가 밀양에 와서 한 행동들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이신애가 교회 목사를 설득하여 살인자를 용서하겠다는 이벤트를 스스로 주도하는 모습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남편의 죽음에서 도망쳐 밀양에서 한껏 자신을 치장하고 거짓 상까지 거짓말하며 스스로 긍정하는 것을 통해 과거의 이신애를 전부 외면하던 것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말이다.
이신애의 이런 맹목적인 도피성 행동들은 결국 살인자가 보여준 스스로에 대한 행동을 교회를 통해 외면한 모습을 통해 박살이 나게 된다. 살인자의 모습과 이신애 자기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영화 상에 이신애가 반발하는 장면들이 나오게 된다. 외면하지 않고 분노한 것이다. 또 재밌는 지점들이 나타난다. 바로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에 공격성을 표출하는 것이다. 왜 하필 교회일까? 다시 살인자와 대면한 장면으로 돌아가야한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사람을 용서하냐고요!!"
왜 이런 대사일까? 이신애에게 있어 자기가 용서를 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하다. 이신애는 자기 자식의 죽음에서조차도 외면하기 위해 용서하러 간거였다. 그래서 용서라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용서를 받았기에 내가 용서할 수 없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외면할 수 없음에, 직접적으로 그 고통을 직면해야만 하기에 이신애가 이러한 워딩을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던 것이다. 고통을 직면하게 했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일을 제공한 약사에게 그러한 고통을 되돌려 줄려고 약사의 남편을 유혹한 거였다. 근데 참 감독이 잔인하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약사의 남편이 이신애의 유혹에 대해 올바르게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약사의 남편은 자기가 유혹에 진다면 벌어질 고통에 대해 직면하여 그 고통에서 벗어난 거였다. 그러니 이신애가 약사의 남편이 그런 모습을 보인 후에 헛구역질을 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근데 참 웃긴건 유혹의 장소가 하늘 아래라는 것이다. 기실 신에게 보이기 위해 선택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디 밀폐된 장소가 아닌 밀양이라는 땅 위에서 벌어지는 행위였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게는 교회와 약사에 대한 분노와 복수일 수도 있을 것이며, 크게는 자기 자신을 밀양으로 내려오게끔 만든 남편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보여? 보이냐고, 잘보이냐고!!"
결국 이신애 스스로가 외면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음에도 올바른 선택을 한 남자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신애는 무슨 선택만이 남아있을까? 자기 자신의 삶 전체를 외면하는 방법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살려주세요.."
그렇지만 이신애가 여지껏 보여준 외면은 나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녀가 살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그녀가 자기 자신의 삶 전체를 외면하는 그 순간조차도 그녀는 살기 위해 외쳤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슬픔과 고통은 항상 찾아온다.
그리고 그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우린 두 가지 선택말고는 없다. 외면하던가, 받아들이던가
그렇기에 감독이 밀양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삶에 대한 의지라고 생각한다.
왜 우린 여기 존재하고 왜 살아가야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이들이 노력했지만, 정답은 없었다.
그러한 대답들이 이어진 수천년동안 우린 계속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린 어찌되었든 살아가야하니까, 우리가 태어난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못 찾았으니까
여러분, 열심히 살아갑시다.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건 여러분 스스로 말고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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